9월 2018

판례평석

모용계좌 개설에 관한 금융기관의 주의의무 위반과 피모용자 또는 제3자의 손해 발생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있는지 판단하는 기준

– 대법원 2016. 5. 12. 선고 2015다234985 판결 –

 

1. 사실관계

대법원은 법률심이므로, 사실심에서 인정한 사실관계를 전제로 법리 판단을 하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이 사건의 경우 그 판결에서 아래와 같이 사실관계를 상세하게 정리하였다. 사실인정의 모범례라고 보여서, 그대로 인용한다.

가.경북 예천군 종합민원과 소속 공무원 A는, 관련 서류를 위조하여 국유지 불하대금 등의 명목으로 돈을 편취하기로 마음먹고, 2011. 2. 10. 원고에게 “이 사건 각 토지가 예천군의 소유인데, 이를 불하받도록 해주겠다.”라고 거짓말을 한 다음, 입찰서 작성에 필요하다는 명목으로 원고로부터 주민등록증과 인감도장을 교부받았다.

나.A는 2011. 2. 10. 피고 농협은행 주식회사(피고 2, 이하 ‘피고 농협’)의 예천군청 출장소에서 과장으로 근무하는 피고 1에게 원고의 주민등록증과 인감도장을 제시하는 방법으로, 원고 명의의 계좌(이하 ‘이 사건 계좌’)를 개설한 다음 원고의 인감도장이 날인된 통장을 교부받았다.

다.피고 1은 원고 명의의 위임장과 인감증명서를 요구하는 등 다른 본인확인 절차를 거치지 아니한 채 원고 명의의 이 사건 계좌를 개설해 주었고, 그 과정에서 A의 요청에 따라 통장 예금주란 아래에 ‘(예천군)’이라는 부기를 해주었다.

라.그 후 A는 2011. 2. 11. 예천군청 사무실에서, 이 사건 통장 중 거래도장과 예금주가 표시된 면을 복사하고, 빈 종이에 예천군 민원실 직인을 날인 후 오려내어 복사한 통장사본의 거래도장란에 붙인 다음, 이를 다시 복사함으로써, 거래도장란에 예청군 민원실 직인이 날인된 통장사본을 변조했다.

마.A는 2011. 2. 13. 원고가 사무장으로 근무하는 법무사 사무실에서, 원고에게 위와 같이 변조한 통장사본이 예천군의 법인통장이라고 말하면서, 이 사건 계좌에 토지 불하대금 명목으로 5억 원을 입금하도록 요구하였다.

바.원고는 2011. 2. 14. 평소 거래하던 예천새마을금고에서 직원 B에게 수신인을 예천군으로 기재한 입금의뢰서를 제출하며, 이 사건 계좌로 5억 원을 입금하도록 요구하였다.
그러나 B는 이 사건 계좌의 예금주가 예천군이 아닌 원고이고, 타행송금 1회 거래 한도가 1억 원이므로 송금이 곤란하다고 설명하였고, 이후 원고의 동의를 얻어 수신인을 원고로 변경한 다음 이 사건 계좌로 5억 원을 입금처리하였다.

사.A는 2011. 2. 15. 피고 농협의 예천군청 출장소에서, 이 사건 계좌개설 당시 미리 원고의 인감도장을 날인 해두었던 출금전표를 피고 1에게 제시하여, 이 사건 계좌에서 5억 원을 출금하여 편취하였다.

2.환송 전 원심판결의 요지

원고는 피고 1에게 이 사건 계좌가 불법행위에 이용되는 것을 방지할 주의의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위반하여 A에게 원고 명의의 이 사건 계좌를 개설하여 준 과실이 있다며, 피고 1 및 그 사용자인 피고 농협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이 사건 소송을 제기하였다.
이에 환송 전 원심은, “금융기관으로서는 대리인을 자처하는 자에게 예금계좌를 개설해 주는 과정에서 위임장과 인감증명서를 제출받고 대리인의 신분증을 확인하는 등의 최소한의 조치를 취함으로써 대리인에 의하여 개설된 예금계좌가 불특정 다수의 잠재적 피해자에 대한 범죄행위에 이용될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해 타인의 불법행위에 도움을 주지 않아야 할 주의의무가 있다”고 전제한 다음,
“피고 1에게는 이 사건 계좌개설 과정에서 본인 확인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아니한 과실이 있고, 이러한 피고 1의 과실과 A의 이 사건 사기행위로 원고가 입은 손해 사이에는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되므로, 원고에 대하여 피고 1은 과실에 의한 방조로 인한 공동불법행위 책임을 부담하고, 피고 농협은 피고 1의 사용자로서 사용자책임을 부담한다.”고 한 후,
피고들의 책임을 제한하여 2억 원과 그 지연손해금의 지급을 명하였다.

3.대상판결의 요지

그러나 대법원은, “원심이 인정한 것과 같이 피고 1에게 이 사건 계좌 개설 당시 원고 본인의 의사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과실이 있다고 하여도, 피고 1에게 사기행위에 대한 방조 책임을 지우기 위해서는, 피고 1이 이 사건 계좌를 개설하여 이 사건 통장을 발급하여 주었다는 사정만으로는 부족하고, 피고 1이 이 사건 계좌를 개설할 때에 이 사건 계좌를 통하여 위와 같은 사기행위가 이루어지며 이 사건 계좌가 그 사기행위를 용이하게 한다는 점에 관한 예견가능성과 아울러 사기행위에 이르게 된 경위, 이 사건 계좌가 사기행위에 관한 원고의 신뢰 형성에 기여한 정도, 원고가 스스로 쉽게 피해를 방지할 수 있었는지 등의 여러 사정들에 비추어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될 수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피고 1이 이 사건 계좌 및 통장이 A의 사기행위 과정에서 예천군과 사이의 진정한 토지불하거래인 것으로 믿게 하는 기망수단으로 이용될 것을 구체적으로 예견할 수 있었다고 인정하기 어려우며,
원고로서는 A의 이 사건 사기행위 당시 약간의 주의를 기울였더라면 5억 원의 손해를 입는 것을 쉽게 방지할 수 있었으므로, 피고 1에게 이 사건 계좌개설 당시 원고 본인의 의사를 제대로 확인하지 아니한 과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과실과 A의 이 사건 사기행위로 원고가 입은 손해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된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로, 원심판결을 파기환송하였다.

4. 소송 등의 경과

가.A에 대한 형사재판

사기당한 원고는 자신을 상대로 사기행각을 벌인 A를 상대로 형사고소하였다. 그 결과 A는 2013. 3. 7.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사기)죄 등으로 징역 8년의 유죄판결을 선고받았고, 그 판결은 2013. 6. 28. 그대로 확정되었다.

나.예천군에 대한 손해배상청구

그러나 A가 별다른 자력이 없었다. A는 원고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들을 상대로 동종 사기행각을 벌였다.
원고는 2013. 3. 20. A 및 예천군을 상대로, A는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책임, 예천군은 소속 공무원인 A의 사용자로서 책임 또는 국가배상법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한다고 소송을 냈다.
그러나 제1심은, 2014. 1. 9. A에 대한 청구를 전부인용, 예천군에 대한 청구를 전부기각했는바, 항소 등이 없이 그대로 확정되었다.
예천군에 대한 청구를, “공무원인 A의 편취행위는 단순한 사경제의 주체로서 한 작용이 아니어서 사용자책임이 아니라 국가배상법이 적용될 것인데, A의 편취행위는 직무집행행위라거나 그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행위라고 볼 수 없어 국가배상법 제2조 제1항 소정의 직무집행관련성이 없다.”고 판단한 것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지만, 이 글에서는 더 이상 다루지 않는다.

5. 파기환송 후 원심

예천군의 책임이 인정되지 않자, 원고는 2014. 4. 16. 피고 1 및 피고 농협을 상대로 이 사건 소송을 제기하였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대상판결은 피고 1에게 이 사건 계좌개설 당시 원고 본인의 의사를 제대로 확인하지 아니한 과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과실과 A의 이 사건 사기행위로 원고가 입은 손해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된다고 보기 어렵다며 피고 농협의 손을 들어주었다.

통상 대법원의 파기환송 판결이 내려지면, 별다른 심리가 없이 그 취지에 따라 사건이 종료된다. 굳이 같은 내용의 판결을 선고하기보다는, 아예 화해권고결정 등으로 종결되는 사례가 실무상 선호되고, 더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이 사건에는 이례적으로, 원고 패소 취지의 파기환송 판결 후에도, 오히려 원고의 청구를 그대로 다 인정해 버리는 판결이 선고되었다. 즉 원고가 파기환송 후 원심에서 피고 농협에 대한 예금반환청구를 선택적으로 추가하였고, 이를 그대로 인용하였다. 그 요지는 아래와 같다.

가.예금지급의무 발생 여부 (긍정)

예금거래기본약관에 따라 송금의뢰인이 수취인의 예금계좌에 자금이체를 하여 예금원장에 입금의 기록이 된 때에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송금의뢰인과 수취인 사이에 자금이체의 원인인 법률관계가 존재하는지 여부에 관계없이 수취인과 수취은행 사이에는 위 입금액 상당의 예금계약이 성립하고, 수취인이 수취은행에 대하여 위 입금액 상당의 예금채권을 취득한다. 예금채권자로서 금융기관에 대하여 예금채권의 반환을 구하는 경우, 채권자는 예금사실만 주장입증하면 되고, 채무자인 금융기관이 그 지급을 면하기 위해 예금채권이 정당하게 인출되어 소멸하였음을 입증하여야 하며, 제3자나 금융기관의 임직원 등 권한없는 자에 의해 예금계좌가 해지되거나 그 계좌의 예금이 인출되어 형식상 예금계좌가 해지되거나 잔고가 없는 것으로 처리되었다고 하더라도 그와 같은 사유만으로 예금채권자의 예금채권은 소멸하지 않고 그대로 존속하므로 여전히 예금채권자는 금융기관에 대하여 예금채권의 반환을 구할 수 있다.
A가 2011. 2. 10. 원고를 기망하여 원고로부터 받은 주민등록증과 인감도장을 교부받아, 원고의 동의 없이 원고를 예금주로 하는 이 사건 예금계좌를 개설할 당시에는 원고와 피고 농협 사이에 예금계약이 성립하지는 않았으나, 원고는 2011. 2. 14. 새마을금고 직원인 B로부터 이 사건 예금계좌의 예금주가 예천군이 아닌 원고라는 것을 듣고도 이를 알면서 이 사건 예금계좌에 5억 원을 송금하였고, 피고 농협이 5억 원을 이 사건 계좌에 송금 처리하였을 때 원고와 피고 농협 사이에는 예금액 5억 원을 예금하는 계약이 성립하였다.

나. 피고 농협의 변제 주장 (부정)

한편 피고 농협은, 가사 예금계약이 성립하였다고 하더라도, ① A는 원고를 대리하여 예금 5억 원을 인출하였으므로 예금채권 5억 원은 변제로 소멸하였으며, ② A에 대한 예금지급은 민법 제470조에 의하여 채권의 준점유자에 대한 유효한 변제에 해당하므로 원고의 예금채권은 소멸하였다고 다투었지만, 아래와 같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① A가 원고 명의로 위 출금전표를 위조한 사실로 유죄의 형사판결이 확정된 사실에 비추어 보면, A가 위 인출 당시 원고를 대리할 권한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② 피고 1은 구 금융실명법 및 피고 농협의 ‘농협업무방법서’에 따라, 이 사건 예금지급을 하기 전에 대리인이라고 자칭하는 A로부터 예금주인 원고 본인의 실명확인증표와 원고 본인의 인감증명서가 첨부된 위임장(인감도장 날인)을 제시받아 확인하여야 하고, 영업점장인 D(피고 농협의 예천군 출장소장)의 사전 결재를 받을 의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위반하여 A로부터 원고 본인의 실명확인증표와 원고 본인의 인감증명서가 첨부된 위임장(인감도장 날인)을 제시받지 않았고, D의 사전 결재를 받지 않은 채 이 사건 예금지급을 하였다.
A가 원고를 예금주로 하여 이 사건 예금계좌를 개설하였다는 사정만으로 피고 1이 A가 예금주인 원고를 대리하여 예금계좌 개설 후 원고가 별도로 입금한 이 사건 예금을 인출할 권한이 있다고 믿은 데에 과실이 없다고 하기에 부족하므로, 채권의 준점유자에 대한 유효한 변제라고 할 수 없다.”라고 하면서, 피고 농협의 채권의 준점유자에 대한 유효한 변제 주장 등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6.평석

가.모용계좌 개설에 관한 금융기관의 주의의무 위반과 피모용자나 제3자의 손해 발생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있는지

(1)이 사건은 농협의 직원인 피고 1이 이 사건 계좌개설 당시 본인확인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아 원고 명의의 계좌가 개설되고, A가 이를 이용하여 원고를 상대로 사기행위를 하였다.
피고 1에게 이 사건 모용계좌의 개설 당시 원고 명의의 위임장과 인감증명서를 요구하는 등 본인 확인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아니한 과실이 있지만, 그 행위만으로는 직접적으로 원고에게 손해를 발생시킬 수는 없고, A의 사기행위와 다시 결합해서만 피고들이 책임을 지게 된다.
따라서 과연 피고 1의 과실과 원고의 손해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존재하는지가 쟁점이었고, 이 부분에 관하여 파기환송 전 원심과 대법원의 판단이 엇갈렸다.

(2) 대법원은, 과실에 의한 방조와 공동불법행위의 성립에 관한 종전 대법원 판결(대법원 2014. 3. 27. 선고 2013다91597판결, 대법원 2015. 1. 15. 선고 2012다84707판결 등)의 태도를 유지하면서,
타인의 불법행위에 대하여 과실에 의한 방조로서 공동불법행위의 책임을 지우기 위해서는 방조행위와 불법행위에 의한 피해자의 손해 발생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되어야 하며, 상당인과관계를 판단할 때에는 과실에 의한 행위로 인하여 해당 불법행위를 용이하게 한다는 사정에 관한 예견가능성과 아울러 과실에 의한 행위가 피해 발생에 끼친 영향, 피해자의 신뢰형성에 기여한 정도, 피해자 스스로 쉽게 피해를 방지할 수 있었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금융기관의 책임이 지나치게 확대되지 않도록 신중을 기하여야 한다는 점 등을 다시금 확인하였다.
하급심과 달리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사실관계를 인정한 것처럼, 상당인과관계의 인정에서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주의의무 기준으로 해서는 안 된다.

나.채권의 준점유자에 대한 변제로서 유효한지

(1)앞서 본 파기환송 후 원심에서는, 원고가 피고 농협과의 예금계약이 성립한 것을 전제로, 그 반환을 청구하는 청구가 인용되었다.
원고와 같은 사기 피해자로서는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청구였을지 모르지만, 이 사건에서는 그렇게 되지 못하였다. 원고가 피고 농협을 상대로 불법행위 책임을 묻기에 앞서 예금반환청구를 할 수 있었지만, 그 길을 가지 않았다.

(2)이에 대하여, 피고 농협은 A에 대한 변제가 채권의 준점유자에 대한 변제로 유효하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아니하였다.
피고 농협으로서는 대상판결로 인하여 천신만고 끝에 겨우 책임을 면하는가 싶었는데, 느닷없이 상정할 수 있는 가장 큰 책임을 지라는 판결이 선고되어 버리고 말았는바, 파기환송 후 원심의 판단을 수긍하기 어렵다.

채권의 준점유자에 대한 변제가 유효하기 위해서는 변제자의 선의무과실이 요구되고, 그 판단 시점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변제 시’에 있어서의 제반 사정을 고려하여 판단하여야 한다(대법원 2003. 5. 16. 선고 2203다2956 판결). 판례는, “은행 직원이 단순히 인감 대조 및 비밀번호 확인 등의 통상적인 조사 외에 당해 청구자의 신원을 확인하거나 전산 입력된 예금주의 연락처에 연결하여 예금주 본인의 의사를 확인하는 등의 방법으로 그 청구자가 정당한 예금인출권한을 가지는지 여부를 조사하여야 할 업무상 주의의무를 부담하는 것으로 보기 위하여는, 그 예금의 지급을 구하는 청구자에게 정당한 변제수령권한이 없을 수 있다는 의심을 가질 만한 특별한 사정이 인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특별한 사정이 있다고 볼 것인지 여부는, 인감 대조와 비밀번호의 확인 등 통상적인 조사만으로 예금을 지급하는 금융거래의 관행이 금융기관이 대량의 사무를 원활하게 처리하기 위한 필요에서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예금인출의 편리성이라는 예금자의 이익도 고려된 것인 점, 비밀번호가 가지는 성질에 비추어 비밀번호까지 일치하는 경우에는 금융기관이 그 예금인출권한에 대하여 의심을 가지기는 어려운 것으로 보이는 점, 금융기관에게 추가적인 확인의무를 부과하는 것보다는 예금자에게 비밀번호 등의 관리를 철저히 하도록 요구하는 것이 사회 전체적인 거래비용을 줄일 수 있는 것으로 보이는 점 등을 참작하여 신중하게 판단하여야 한다(대법원 2013. 1. 24. 선고 2012다91224 판결 등 참조).”는 입장이다.

(3)이 사건의 경우 A가 2011. 2. 10. 피고 1에게 원고의 주민등록증과 인감도장을 제시하는 방법으로 이 사건 계좌를 개설할 당시 피고 1이 원고 명의의 위임장과 인감증명서를 요구하는 등 다른 본인확인 절차를 거치지 아니한 채 원고 명의의 이 사건 계좌를 개설해 준 과실과는 별론으로 하고, 2011. 2. 14. A에게 이 사건 예금을 지급할 당시에 과연 피고 1의 과실을 인정할 수 있는가? 예금계약이 성립될 때의 사정과 그 후 지급이 될 때의 사정은 다르고, 후자의 사정이 이 부분 판단의 근거가 될 것이다.

A는 2011. 2. 10. 이 사건 계좌를 개설하였고, 2011. 2. 14. 피고 1에게 원고를 대리하여 개설을 신청했던 바로 그 계좌에 입금된 예금을 지급해달라고 청구해왔다.
피고 1 본인이 A의 신청에 의해 개설한 계좌이고, 그로부터 불과 4일 후에 동일인이 같은 계좌에서 예금지급을 요청해온 것이다. 예금주 법무사 사무장인 원고와 그 대리인 예천군청 민원실 공무원 A 또한 모두 아는 사람이었다. 피고 1로서는 당연히 예금지급청구에 대해서도 A에게 정당한 권한이 있을 것으로 믿었을 수 있다. 제시된 거래인감과 비밀번호도 일치했다.
이 사건 예금지급 당시 정당한 변제수령 권한이 없을 수 있다는 의심을 가질만한 무슨 특별한 사정이 존재했다고 보기 어렵다. 한편, 파기환송 후 원심은, “㉮ 구 금융실명법 제2조 제2호, 제3호, 제3조 제1항, 제2항, 제3항 및 ‘구 금융실명법 시행규칙’제3조의 규정에 의하면, 금융기관은 예금을 지급함에 있어서 예금주가 개인인 경우 예금주의 주민등록증에 의하여 실지명의를 확인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예외적으로 ‘실명이 확인된 계좌에 의한 계속거래’의 경우에는 실지명의를 확인하지 아니할 수 있으므로, ‘실명이 확인된 계좌에 의한 계속거래’라고 하더라도 실지명의를 확인할 의무가 발생할 수 있다.”고 하였듯이, 실명이 확인된 계좌에 의한 계속된 거래의 경우 금융실명법상 실지명의 확인의 예외가 될 수 있음이 분명하다.
아직 대법원에서 심리 중인바(대법원 2018다221867호 사건), 귀추가 주목된다.

다.원고와 A의 공동불법행위로 인한 예금지급이었다는 이유로, 그 손해배상채권에 의한 상계

(1)채권의 준점유자 항변까지 받아들여지지 아니한다면 피고 농협으로서는 더 손 쓸 도리가 없는 것일까? 군유지의 불하와 관련해서 무슨 권한이 있다고 보기 어려운 민원실 직원에 불과한 A에게 주민등록증과 인감도장을 교부한 원고는 단순히 피해자에 불과할까?
(i) 원고가 법무사 사무장이라, 오랫동안 법률사무에 종사해 온 점, (ii) 원고는 2011. 2. 14. 평소 거래하던 예천새마을금고에서 이 사건 계좌로 5억 원을 입금하였을 때, 위 금고 직원인 B로부터 이 사건 계좌의 예금주가 예천군이 아닌 원고이고, 타행송금 1회 거래 한도가 1억 원이므로 송금이 곤란하다는 설명까지 받아, 그동안 예천군의 법인계좌로 알고 있었다는 원고의 인식과는 어긋난다는 사실을 인지한 점, (iii) 그러나 원고는 별달리 확인이나 조치를 하지 않은 채 수신인을 원고로 변경하도록 하면서까지, 위 5억 원을 송금하도록 한 점, (iv) 원고가 이와 같이 송금하도록 하지 않았더라면, 바로 그 다음날인 A가 피고 농협의 예천군청 출장소에서, 이 사건 계좌에서 5억 원을 출금 편취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보이는 점, (v) 아울러 원고가 A에게 건네준 주민등록증과 인감도장으로 말미암아, A는 이 사건 계좌개설 당시 미리 출금전표에 날인을 해 두어, 이를 피고 1에게 제시하여 위 돈을 출금한 점, (vi) 위 출금전표를 보고서 피고 농협은 원고가 A의 대리인으로서, 또는 수권을 받아 위 돈의 출금요구를 하는 것으로 잘못 인식하여, 위 돈을 지급한 점 등을 종합하면, 비록 피고 농협이 위 5억 원을 A에게 지급한 것이 채권의 준점유자에 대한 변제 등으로 인정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원고가 A와의 공동불법행위로서 피고 농협에 대하여 손해배상책임을 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피고 농협은 원고에 대한 위 손해배상채권을 자동채권으로 원고의 예금반환청구에 맞서게 될 것이다. 원고의 청구원인이 어떠하든 원고의 청구가 인용되기는 힘들 것이다.

(2)대법원 1998. 11. 10. 선고 98다20059 판결이 참고가 될 것 같다.

①사실관계

갑, 을 등은, 사채업자들이 가계수표를 개설하려는 사람의 예금계좌에 돈을 일정 기간 예치시켜 은행거래실적을 높여 주고 그 대가로 수수료를 받는 것을 이용하여, 사채업자가 예치시킨 예치금을 폰뱅킹방법으로 편취하기로 공모하였다.
갑은 가계수표를 개설하여 준다는 광고를 내어 이를 보고 찾아온 소외인으로부터 가계수표를 개설하려는 병의 주민등록증과 도장 등을 교부받아, 1996. 2. 10. 피고 은행의 서대구지점에서 마치 자신이 병인 것처럼 가장하여 병의 주민등록증을 제시하며 병 명의의 모용계좌의 개설을 요구하였다.
피고 은행의 담당직원은 갑이 예금개설명의인 본인인지 여부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갑에게 병 명의로 예금계좌(이하 ‘이 사건 입금계좌’)를 개설하여 주고, 동시에 그 계좌를 폰뱅킹이 가능한 계좌로 등록하여 주었다.
을은 사채업자인 원고에게 5일간 지정된 계좌에 1억 원을 입출금을 반복하여 예금평균잔액을 높여 주면, 수수료로 금 1,250,000원을 지급하겠다고 기망하였다. 이에 원고는 자신의 직원인 정에게, 을로부터 병의 주민등록증과 도장 등을 교부받아 병 명의로 예금계좌를 개설하고 그 통장과 도장을 원고에게 전달하도록 지시하였다.
원고의 지시를 받은 정은 1996. 2. 13. 피고 은행 이현공단지점에서 병 명의 예금계좌(이하 ‘이 사건 출금계좌’)를 개설하여, 다음 날 그 통장과 도장을 원고에게 전달하였다.
그런데, 정이 이 사건 출금계좌를 개설하기 위하여 예금거래신청서의 비밀번호를 기재할 때, 갑 등은 정의 양옆에 밀착하는 방법으로 출금계좌의 비밀번호를 몰래 알아낸 후, 정이 병 명의의 출금계좌를 개설한 즉시 자신이 병인 것처럼 가장하여 피고 은행 직원으로부터 미상의 방법으로 출금계좌번호를 알아냈다.
갑 등은 원고가 1996. 2. 15. 이 사건 출금계좌에 1억 원을 입금하자마자 폰뱅킹으로 위와 같이 알아낸 이 사건 출금계좌번호와 비밀번호 등을 눌러 갑이 미리 개설하여 둔 병 명의의 이 사건 입금계좌로 1억 원을 이체하여, 인출하였다.
한편 원고는 1996. 7. 1. 병으로부터 병 명의로 된 이 사건 예금채권을 양수한 후 피고 은행에 대하여 예금반환청구를 하였다. 피고 은행이 채권의 준점유자에 대한 변제임을 이유로 거부하자, 원고는 피고 은행을 상대로 예금반환청구소송을 제기하였다.

②판단

대법원은, “소위 폰뱅킹에 의한 자금이체신청의 경우에는 은행의 창구직원이 직접 손으로 처리하는 경우와는 달리 그에 따른 자금이체가 기계에 의하여 순간적으로 이루어지지만, 그것이 채권의 준점유자에 대한 변제로서 은행에 대하여 요구되는 주의의무를 다하였는지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서는, 자금이체시의 사정만을 고려할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행하여진 폰뱅킹의 등록을 비롯한 제반 사정을 총체적으로 고려하여야 하며, 한편 은행이 거래상대방의 본인 여부를 확인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 담당직원으로 하여금 그 상대방이 거래명의인의 주민등록증을 소지하고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그 직무수행상 필요로 하는 충분한 주의를 다하여 주민등록증의 진정 여부 등을 확인함과 아울러 그에 부착된 사진과 실물을 대조하여야 할 것인바, 만일 실제로 거래행위를 한 상대방이 주민등록상의 본인과 다른 사람이었음이 사후에 밝혀졌다고 한다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은행으로서는 위와 같은 본인 확인의무를 다하지 못한 과실이 있는 것으로 사실상 추정된다고 할 것이다.”고 하며, 소위 폰뱅킹의 경우 그 중요성을 감안하여 반드시 본인 여부를 확인하여 본인에 의하여서만 등록이 가능하도록 되어있음을 전제한 후,
“이 사건 입금계좌의 개설 및 폰뱅킹의 등록이 명의자인 병이 아닌 병을 참칭한 갑의 신청에 의해 이루어졌고, 이는 개설일 본인 여부에 대한 확인을 게을리 한 피고 은행의 담당직원의 과실에 기인한 것이므로, 피고 은행의 갑에 대한 예금 지급은 채권의 준점유자에 대한 변제로서 유효하다고 보기 어렵다”는 원심의 판단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피고 은행의 손해는 갑의 사기행위가 주된 원인이지만, 갑의 사기행위는 병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가계수표를 발행할 자격을 취득하기 위하여 주민등록증과 도장을 교부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갑, 병, 원고(직원 정에 대한 사용자책임)의 공동불법행위로 인한 피고 은행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을 자동채권으로 한 피고 농협의 상계항변을 받아들여 원심을 파기환송하였다. (끝).

 

PDF 다운로드: 180625 경남변회소식지-판례평석(조명현)